조직하고, 설득하고, 감화시킨다. 사람을 움직이는 리더의 본질
요즘처럼 개인주의적이고 파편화된 시대.
아이들은 사람과의 연결보다, 화면과의 연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그런 지금읜 아이들에게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는 단순한 독립운동가가 아닙니다.
사람을 설득하고, 조직하고, 교육하고, 그 힘으로 수많은 이들을 하나로 엮어냈던 사람입니다.
특히 미국 교포 사회에서 도산을 따르는 그룹과 이승만을 따르는 그룹이 나뉠 정도로 도산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안창호 선생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다시금 묻게 됩니다.
"내가 꿈꾸는 목표를 위해, 나는 사람들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

여러분은 도산 안창호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사람들은 도산 안창호가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만 알고,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잘 모릅니다.
신민회 설립, 대성학교 설립 정도 외에는 그의 업적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사실 도산은 청년기부터 차세대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제부터 멘토와 함께 우리에게 덜 알려진 도산 안창호의 행보를 살펴볼까요?
멘토가 첫번째로 들려드릴 도산의 이야기는 그의 청년 시절, 지금으로부터 약 1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899년,
도산은 평안도에 점진학교라는 서양식 초등학교를 세웠습니다.

< 점진학교 졸업 사진 - 출처 :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점진학교의 졸업사진 (출처 : 도산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남녀칠세부동석이 일반적이었던 시절, 그는 남녀공학 초등학교를 세워 어려운 나라의 운명을 짊어질 차세대 인재를 키우려고 했지요. 그에게 교육은 산업과 함께 갔습니다. 학교와 함께 그는 주변 황무지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이곳 황무지를 개간하여 사람들이 농사를 지어 먹고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죠.
대동강 유역의 땅을 개간하여 사람들이 못 쓰는 땅이 없게 하려는 게 도산의 마음이었습니다.
동시에 도산은 한국의 본격적 근대식 시민단체라 할 수 있는 독립협회 평양지부에서 활동했습니다.

<독립협회 평양지회 회원 활동 당시 가운데가 도산 (출처 : 도산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독립협회라는 플랫폼에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서양의 발전된 문물과 제도, 외국 사정을 들려주고, 한국인들이 진심으로 배우고 깨우쳐서 나라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몫을 다 하길 목표로 삼았습니다.

<사진 : 만민공동회로 모여드는 사람들>
그의 나이 18세, 도산은 독립협회 회원으로서 평양 쾌재정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연설 주제는 부패와 민중의 고통이었습니다.
당시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그는
“백성을 도와야 할 관리들이 도리어 백성을 짓밟고
재물을 빼앗고 있으니 나라가 어찌 돌아가겠는가”
라며 관리의 부패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여기서 쾌재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을 가지고 유머러스한 멘트를 넣는 연설가로서의 감각도 발휘했죠.
“여러분, 쾌재정에서 이렇게 뵈니 쾌재(통쾌함)가 절로 납니다.
오늘은 황제 폐하의 탄신일이니 더욱 뜻깊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에게 쾌재를 부를 일이 별로 없습니다.
백성을 도와야 할 관리들이 도리어 백성을 짓밟고 재물을 빼앗고 있으니,
나라가 어찌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1902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도산. 훗날 귀국하여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려 미국 땅에 발을 디뎠지만,
그의 관심은 곧 동포들의 삶으로 옮겨갔습니다.

도산은 자신의 공부에만 몰두하지 않았습니다.
기회를 찾아 미국 땅에 건너와서 농장에서 고된 일을 하던 동포들을 도왔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 단체인 공립협회를 세우고, 민족의 자강과 연대를 위한 단체 흥사단의 씨앗을 뿌립니다.
청년 도산이 미국 땅에 도착해 처음 발을 디딘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는 수많은 한인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미국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지역 한인들을 만난 안창호는 곧 한인들이 겪던 열악한 현실을 목격합니다.
낮은 임금에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한인 노동자들
고향을 떠나 머나먼 미국에 와서 각종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들을 도와줄 사람들은 없었고, 가난한 살림에 누군가를 돕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도산이 선택한 일은 단체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한국인 노동자들이 모인 교회나 친목 단체는 있었지만 도산이 꿈꾸던 단체는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규칙과 조직을 갖춘 본격적 교민 단체를 만드는게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만든 단체가 바로 최초의 근대식 교민 단체 공립협회였습니다.
공립협회는 미국 한인 사회가 드디어 제대로 체계를 갖추고 활동하게 해준 단체였습니다. <공립신보>라는 신문을 발행해서 소식을 전하고 미국에 사는 민족의식을 고취했습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가 더 어려워졌을 때, 공립협회와 <공립신보>는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의 도산 안창호 선생 - 출처 : 상동>
곧 도산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캘리포니아의 또 다른 도시 리버사이드에 간 도산은 그곳에서 또 한번 한인 조직을 만듭니다. 리버사이드의 한인들은 주로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한국인들이 미국에 가서 가장 많이 했던 일 중 하나가 농장 취업이었거든요. 하와이, 캘리포니아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 오렌지 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 대가로 주어지는 그리 많지 않은 임금을 고국에 있는 가족에게 보냈죠. 사탕수수, 오렌지 농장에서의 일은 일손이 많이 필요하고, 사람들이 대체로 기피하는 힘든 일이었습니다.
1904년,
도산의 다음 과제는 리버사이드의 한국인 노동자들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도산은 1904년 리버사이드에 파차파 캠프를 설립했는데요, 바야흐로 본격적인 한인 정착촌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곳에는 한인 300명이 가족 단위로 모여 살았고, 공동체 의식이 강해서 결혼식, 교회 예배, 강연 등 단체 활동이 활발했습니다. 또 도산은 미국에 일자리를 구하러 건너 온 한국인들을 위해 농장 일자리를 알아봐주고, 노동자와 농장을 중개해주는 단체도 세웠습니다. 파차파 캠프의 한국인들은 나라가 어려워졌을 때 한국 독립을 위한 기금도 모아서 보냈습니다. 공립협회, 파차파 캠프 같은 노력은 몇 년 후 대한인국민회, 흥사단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교민 사회의 두 축 그리고 반목과 중재
미국 교민 사회는 도산의 지도하에 단결하는 것 같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당시 미국의 한인 사회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 뿐 아니라 이승만과 박용만이라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훗날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 해방 뒤 정부 수립 후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인물이죠. 도산 뿐만 아니라 이승만도 청년 시절 독립협회 활동을 하다 미국 유학길을 떠났습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아서 "이 박사"라는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청년기부터 지도자로 활동했고, 당대 한국인들 가운데 가장 학력이 높았으며 영어도 잘했기에, 이승만은 자연스럽게 미국 한인 사이에서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한편 이승만에 비해 대중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그럼에도 당시 한인 사회에서 유명했던 또다른 지도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박용만입니다. 박용만은 처음에 일본에 유학했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는데요. 그는 중서부 네브래스카 주에서 고등하교에 진학하여 대학교까지 학업을 마무리했습니다.
대학교에서 그는 학군단, 즉 ROTC 제도를 경험합니다. 이때 받았던 군사훈련을 계기로 박용만은 한국 독립운동이
무장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박용만은 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을 미국에서 설립하여
무장 독립 투쟁을 준비합니다.
반면, 미국 동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승만은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우드로 윌슨 프린스턴대학교 총장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맥을 바탕으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미국 정가와 외교가에 알리는 데에 주력했습니다.
이승만과 박용만은 각각 미국 동부, 중서부를 중심으로 활동해서 기반도 달랐고, 추구하는 독립운동 방식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자연스럽게 두 사은 반목하고 대립하게 되었죠. 이들의 노선 차이는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 교민 사회 전체를 분열시킬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어느덧 미국 한인 사회의 또다른 지도자로 우뚝 선 도산은 이승만과 박용만을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이 문제가 두 지도자 개인 간 화해로 풀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도와 규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죠. 도산은 전 미국 한인 사회를 아우르는 대한인국민회에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 갈등을 풀어나가기 원했습니다.

<대한인국민회 동지들과 도산안창호 선생 (출처 : 인천투데이 기사)>
그가 대한인국민회를 이끌 동안 갈등은 회칙과 규율에 따라 한 동안 잠잠해졌고, 한인 사회는 잠시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도산은 1913년 흥사단을 설립합니다. 흥사단은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민단체입니다.
흥사단의 목표는 청년 교육 및 도덕적 자기 수양이었습니다. 도산은 흥사단을 통해 무장투쟁노선, 외교노선과 다른 제3의 노선,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도산은 미국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1919년,
전세계 한국 독립운동을 지도할 임시정부가 탄생하자 그는 그곳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3.1운동의 결과로 중국 상하이에서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했습니다. 각국에 흩어져 있던 임시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자유로웠고, 한국인들의 독립요구를 알릴 외국인들이 많이 살았던 상하이에서 하나로 합쳐진 거죠. 사람을 모으고 조직을 만드는 데 탁월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이 빠질 수 없었습니다. 도산은 임시정부 내무부장관을 맡아서 한국에 연락망을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교통국을 설치해서 일제의 감시를 뚫고 한국에 임시정부가 통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임시정부는 교통국을 이용해서 국내와 비밀리에 소통하고, 자금을 모으고, 정보를 주고받았습니다.
또한 도산은 자신이 세운 흥사단의 조직과 미국 교민 사회 친분을 활용해서 중국과 한국, 미국을 연결하는 연락망을 만들었습니다. 비록 교통국은 일제의 탄압 때문에 국내 연락망을 오래 유지하진 못했지만, 서로 떨어진 사람들을 연결하는 도산의 강점이 드러난 좋은 사례였습니다.
도산은 조직만큼 말과 글을 중시했는데요, 그는 <독립>이라는 임시정부의 기관지를 출판했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을 모으고 함께 일하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그런 활동도 글을 통해 홍보되어야 한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도산이 중시했던 또 하나, 바로 교육이었습니다. 도산은 상하이에 인성학교를 세워서 인재를 양성했고, 중국 남부 광둥성에도 군사훈련을 하게 했습니다. 이 당시 임시정부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모여서 갈등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이미 미국 교민 사회에서 이승만과 박용만의 갈등을 대한인국민회라는 제도 안에서 중재한 적 있는 도산은 임시정부에서도 중재자를 자임했습니다.
임시정부에서 도산은 언제나 결과물이 손에 잡히는 일을 했던, 실천의 지도자였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이 빚어지면 중재에 나섰고, 많은 일을 하면서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서번트 리더십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마 그래서 도산이 한 일은 많지만, 정작 그가 무엇을 했는지 대중적으로 아는 사람이 적은게 아닐까 싶습니다.
1938년,
도산은 안타깝게도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얻은 병으로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는 떠났지만, 정신은 남았습니다. 그의 가족들 역시 새로운 시대를 위한 실천을 이어갔습니다.
도산의 평생 조력자였던 아내 이혜련은 도산이 떠난 뒤 30여 년 동안 자녀들과 함께 미국에서 살면서 ‘도산보다 더 도산 같았던 사람’으로 자녀들에게 기억되었습니다.
장남 안필립은 할리우드 최초의 한국계 배우로 활약하며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장녀 안수산은 미 해군 최초의 한인계 여성 장교로 복무하며, 차별 속에서도 조국과 세계를 향한 책임을 실천했습니다."
차남 안필선은 명문대 UC 버클리를 졸업하고 항공우주 분야 엔지니어가 되어 기술 발전에 이바지했습니다.
차녀 안수라는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졸업 후 레스토랑을 운영했고, 막내아들 랄프 안은 제2차 세계대전에 해군으로 참전했다가
교사, 단역 배우를 거쳐서 말년에는 아버지를 기념하고 한인 사회에 기여하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도산의 평생 조력자였던 아내 이혜련은 도산이 떠난 뒤 30여년 동안 자녀들과 함께 미국에서 살면서 '도산보다 더 도산 같았던 사람'으로 자녀들에게 기억되었습니다. 장남 안필립은 헐리우드 최초ㅡ이 한국계배우로 활약하며 헐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장녀 안수산은 미 해군 최초의 여성 장교로 복무하며, 차별 속에서도 조국과 세계를 향한 책임을 실천했습니다. 차남 안필선은 UC버클리를 졸업하고 항공우주 분야 엔지니어가 되어 기술 발전에 이바지했습니다. 차녀 안수라는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졸업 후 레스토랑을 운영했고, 막내아들 랄프 안은 제2차 세계대전에 해군으로 참전했다가 교사, 단역 배우를 거쳐서 말년에는 아버지를 기념하고 한인 사회에 기여하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세 자녀 모두 미군에 입대 : 왼쪽부터 막내아들 랄프 안, 안필립, 안수산 (출처:대한인국민회)
언제든지 Keep smile
도산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 적은 말입니다.
작지만 강한 이 말 속에 도산이 평생 보여준 낙관과 용기, 그리고 조용한 실천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모습을 알고 나니, 어떠신가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쉽게 듣지만,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면 역사와 우리가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 필요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사람을 감화시키고 서로 연결하여 팀을 만든 모습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줍니다.
역사 개념을 암기하는 것을 넘어서
역사의 울림을 함께 배우고 나누는 자리.
멘토들과 함계 하세요!




